첼로 연주자들의 하나의 지표라고도 할수 있는 이곡을
프로 연주자들은 어떤식으로 해석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곡에 워낙 홀릭되어있는 상태라 얼마나 다른버전이 많은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리저리 찾다보니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았다.
개인적인 선호도 순서로 나열해보겠다.
일단 다른연주자들에 비해서 템포가 빠르다.
빠르면서도 섬세한 감정처리가 무척이나 와닿았다.
다음은 로스트로포비치에 대한 간략한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러시아 첼리스트 및 지휘자. 뛰어난 기교 및 해석능력 외에도, 다양한 신규 첼로 곡들을 소화하는등,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로 꼽힘. 구 소련(현 아젤바이얀:Azerbaijan) 바쿠(Baku)시에서 태어나, 2차세계대전동안 모스크바동쪽 10시간 거리의 오렌버그(Orenburg)로 옮겨 거주하다가 16세인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 이후 70년대에 정치적이유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47세인 1974년 미국으로 망명, 19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 당함. 10세때부터 유명한첼리스트이자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연주를 배우다, 16세인 1943년,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모스크바 컨저버토리(Moscow Conservatory)에서 공부, 29세인 1956년에 첼로 교수로 부임.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러시아 작곡가)와 프로코피에브(Sergei Prokofiev, 1891-1953, 20세기 최고 러시아 작곡가)로부터 사사,18세인 1945에 소련 연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크로 인정을 받기 시작. 1942년 첫 첼로 협주를 한 이후, 수차례에걸쳐 프라하 및 부다페스트에서 수상을 하며 23세인 1950년에는 최고의 스탈린 상(Stalin Prize)을 수상. 이후모스크바 및 레닌그라드(Leningrad) 컨저버토리에서 강의하면서, 볼쇼이(Bolshoi) 극장소속의 소프라노갈리나(Galina Vishnevskaya)와 결혼.
23세인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프로코피에브(Prokofiev)가 작곡한 첼로소나타(Cello Sonata in C, Op.119)를 초연함과 동시, 1953년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이 된 소나타를 카발레스키(Dimitry Kabalevsky, 1904-1987, 러시아 동요작곡가)와함게 완성, 성공적으로 초연. 37세인 1964년, 당시 서독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헌곡을 시연.1968년, 41세때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Soviet State Symphony Orchestra)와 런던(LondonProm)에서 체코의 드보르작(Antonin Dvorsak) 곡으로 오케스트라 데뷰공연을 하던 중, 그날 밤인 8월 21일,소련의 체코 침공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함.
구 소련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다 스승인 쇼스타코비치는 1948년모스크바 및 레닌그라드 교수직을 박탈 당하며, 로스트로포비치역시 학교를 중퇴. 이후 시베리아 유배를 당함. 이후 미국 망명뒤소련에서의 연주 금지를 당함. 1993년 러시아 헌법사건(1993 Constitutional Crisis) 시 서방세계와 같이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측을 옹호,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차후 푸틴(Vladimir Putin)대통령과도교류. 79세때인 2007년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램린 궁으로 초청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장암으로 사망, 모스크바노보데비키(Novodevichy Cemetery)에 묻힘.
수많은 곡 중에서도 특히 드보르작 및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에대한 해석이 유명.
2. 미샤 마이스키
풍부한 음색을 바탕으로 절제된 감정 표현이 아주 인상깊은 버전이다.
강약조절이 매우 일품인 버전으로 마지막의 클라이막스 부분은
터져나오는 느낌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세계3대 첼리스트로 꼽히는 첼로의 거장,미샤 마이스키는 오늘날 런던,파리,베를린,비엔나,뉴욕과 동경을 비롯한 전세계의 유명 음악 홀에서 음악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있다. 그의 연주는 시적이며 섬세하고 정교한아름다움을 눈부신 테크닉 속에 함께 표출해내고 있다. 윤기 있는 음색의 그의 연주는 훌륭한 성악가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매력을지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인데,마이스키는 아주 아름답고 서정적인 바흐를 표현하여 바흐작품의 원류에 취해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바흐의 서정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한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 음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연주" 라는 평을 받으며 바흐 모음곡의 불후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미샤 마이스키는 1948년 구소련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인 리가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하여 레닌그라드에서공부를 계속했으며 17세 때 전 러시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그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모스코바음악원에서 무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로 공부하면서 전 소비에트 연합을 통해 연주회 경력을 쌓아나갔다.
미샤 마이스키는 첼로의 거장 무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모두 사사한 유일한 첼리스트이다. 당시로스트로포비치는 어린 마이스키를 가리켜 "차세대 첼리스트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 될 것이다."라고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체제 운동에 관계된 것으로 간주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그 사이 연주도 할 수 없었으며 자유마저 빼앗기며 시련의 세월을 거치며 마이스키는 1972년 이스라엘로 망명했다.서방으로의 망명 후,이태리의 피렌체에서 열린 유명 콩쿠르인 가스파르 카사도 국제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래 마이스키는1973년 11월,윌리엄 스타인버그가 지휘하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대망의 카네기홀에의 데뷔공연을 하게 된다.
이 카네기홀 데뷔직후 그는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18세기산 몬타냐 첼로를 선사받아 오늘날까지 이
악기로 연주해오고 있다. 1974년,마이스키는 미국,이스라엘 문화재단의 스칼라 쉽을 받고 그레고르 파아티고르스키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고 마이스키는 피아티고르스키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1975년이래 마이스키는 드디어 전미지역과 유럽에 걸쳐 활발한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파리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콩쿠르에서 마이스키는 위촉된 곡을 연주하여 특별상을 수상했다.
마이스키는 기돈 크레머가 고정 출연하는 록켄하우스 페스티발에 종종 참가하여 그의 실내악에 대한 열정을 과시하고 있으며마르타 아르헤리치,라두 루푸,피터 제르킨,말콤 프레이져와 넬슨 프라이어 등 유명 피아니스트들과도 찰츠 부르그 페스티발 등 유명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다.
실내악에 대한 미샤 마이스키의 한결같은 애정은 그가 기돈 크레머의 로켄하우스 페스티벌에 자주 참여한다는 사실 뿐아니라 특히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유럽 전역에서 무수한 리사이틀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첫작업으로서 크레머, 번스타인과 함께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를 녹음한 이후, 1985년에 그는 이 회사의 독점 아티스트가 되었다.그때부터 무수한 음반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많은 음반이 각종 음반상을 받았다.
그가 두 번에 걸쳐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아르헤리치와 함께한 바흐와 베토벤의 소나타집,아르헤리치,크레머와의 쇼스타코비치,차이코프스키 피아노 3중주,그리고 블로흐,보케리니,드보르작,엘가,하이든,미아스코프스키,프로코피에프,생상스,슈만,쇼스타코비치,차이코프스키,비발디의 첼로
협주곡들에 이르는 방대한 레퍼토리가 그의 왕성한 녹음 활동을 증명해준다.
네 장의 리사이틀 음반 - <명상,Meditation>,<아다지오>,<첼리시모,Cellissimo>,그리고 <꿈꾼 후에,Apres un reve> - 는 특별한 찬사를 받아왔다.
그는 <무언가집,Songs without Words>이라는 타이틀로 두 장의 음반을 녹음했는데,하나는 프란츠 슈베르트에게,또 하나는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헌정되었다.
마이스키는 2000년 한해를 고스란히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일에 바쳤는데,중국,호주,남북아메리카,그리고 무수한 유럽 국가들을 순회하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80회 이상 연주했다. 최근에는 마르타아르헤리치와 함께 실황 음반
현재 벨기에에서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전 세계를 무대로 가장 분주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사랑받는 거장 첼리스트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로스트로포비치,요요마와 더불어세계 3대 첼리스트로 '장한나의 스승'이란 점에서 한국과 인연이 깊은 연주자다. 한국팬이 유난히 많아 2003년과 2004년내한 연주회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1997년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낸 베스트 음반에 한국가곡 <청산에 살리라>와<그리운 금강산>을 넣어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음악은 종교다" 라는 신념으로 음악을 대하는 사람,미샤 마이스키.
그는 분명 우리시대 최고의 첼리스트이다.
http://blog.daum.net/sojtkim/10612585?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ojtkim%2F10612585
첼로음의 깊이가 유난히 깊게 느껴지는 것이 매력인 버전
헝가리 태생의 미국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굴곡진 20세기를 살면서 자의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했고,서구 현대 문명의 특징인 냉철한 이성주의와 관념주의적 접근에 의한 절대미를 추구한 냉철하고 지적인 연주자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도 필요 이상의 몸짓이 없고 오직 음악을 위한 종사자이고자 했던 20세기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중 한 사람이며,현역 독주자 중 최원로급에 속한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7월 5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원래 러시아 태생으로 헝가리로 이주했는데,당시 국적도 얻지 못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이 감지하고 7세부터 첼로를 가르쳤다.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음악원(Franz Liszt Academy of Music)에 입학해 다비드 포퍼(David Popper)의 제자였던 아돌프 쉬퍼( Adolf Schiffer)문하에 들어가 15세에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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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어린 나이에 연주대에 오른 슈타커는 1939년 음악원을 졸업할 즈음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학생 시절,자신의 스승 캐러비에게 코다이(Zoltán Kodály)가 헌정한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초연하였다. 이를 계기로 슈타커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졸업한 후,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로 취임하면서 연주가로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연주는 물론 거의 2년 동안 첼로를 만져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1945년에는 부다페스트 오페라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을 겸임하게 되었고,비로소 헝가리 국적을
획득했다.
또한 피아니스트인 조지 쉐박(Gyorgy Sebok)등과 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멈추고 1948년 루마니아,오스트리아,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댈러스 교향악단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 후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의 요청으로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1951년,피아노의 율리우스
카첸(Julius Katchen),바이올린의 요제프 수크(Josef Suk)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1969년 카첸의
죽음으로 그만두었다.
다시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시카고 교향악단에서 수석주자를 맡은 다음 솔리스트가 되었다.
1958년부터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육 활동도 하면서 뛰어난 첼리스트를 차례로 배출하였다.
슈타커는 1950년 무렵 레코딩한 코다이 무반주 첼로의 생생하고 생명감 넘치는 녹음으로 유명하며,
이후 금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꼽히고 있다. 그는 초인적인 기교의 소유자이지만 쇼맨십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연주에서 차갑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그는 깊이 성찰하는 첼리스트이며,작품이 지닌 묘미와 뉘앙스를 섬세하게 살려낸,그리고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따스함을 훈훈하게 풍겨낸 첼리스트이다.
1972년 뉴욕 필과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쇤베르크는 이런 평을 했다.
..."슈타커는 귀족적인 엄격함을 갖고 연주했고,고도의 논리로 음악적 소재를 구도화했다.
그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첼로 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울렸다.
그의 하이든 협주곡은 분명함과 균형감에 있어 극치였다."...
이처럼 슈타커는 어떤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다. 항상 냉정하게 작품의 양식을 정확히 파악해 고도의 테크닉과 함께 그것을 축으로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연주 매력은 불과 얼음이 환상적으로 매치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과장된 제스처나 쇼맨십에 반대하며,또 하나는 헐리우드 영화 속에 멜랑콜릭한 장면에 단골 악기로 등장하는 첼로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나친 비브라토나 불필요한 포르타멘토를 피한다.
슈타커의 또 하나의 업적으로는 첼로 교육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무척 즐기는데,스스로가 성격상 연주가보다는 교육자에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다음 세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스승의 역할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재에도 이미 파리 고등 음악원의 마크 코페,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헨켈처럼 인디애너 대학에서 배출한 제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연주자·교육자로 활약하면서 슈타커 사단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비브라토를 비롯해 많은 테크닉들을 바이올린 주법에서 착안해 냈다고 하는데,그의 테크닉 교칙본과 또 그가 편집한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첼로를 배우는 학도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또한 왼손의 독립성과 강화를 꾀하는 <첼로 메소드>의 저자로도 이름이 높다
http://blog.daum.net/sojtkim/1061270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ojtkim%2F10612707
부드럽게 휘감으면서도 강렬한 부분에서는 강하게 쳐줄줄 아는
완급조절이 아주 멋진 버전이다.
연주하는 내내 그의 음미하는 듯한 표정은 보는사람도 덩달아
그 부드러움에 심취하게끔 하는 매력이 있다.
요요 마(馬友友,Yo-yo Ma)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1955년 10월 7일,프랑스 파리에서 중국계로서 음악교수인 아버지 마샤오쥔(馬孝駿,Hiao-Tsiun Ma)과 메조 소프라노가수인 어머니 마리나 루(盧雅文,Marina Lu) 사이에서 태어났다.
15번이나 그래미상의 영예를 수상한 요요마는 4세 때부터 첼로를 시작해 어린시절부터 신동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6세 때 파리 대학 예술고고학 연구소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질 정도의 천재였다.
1962년,그가 7세 되던해 그의 가족은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고,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번스타인이 지휘한 TV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아이작 스턴과 카네기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미국전역에서 신동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요요 마는 줄리어드 음대와 1976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1977년부터는 유럽으로도 연주 활동의 폭을 넓혔다.
베를린 필,빈 필 등 최고의 악단과 협연한 그는 1978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연주해 왔으므로 그의 연주 활동도 40년이 넘어섰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음반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실내악 연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영욱과 엠마누엘 액스와의 트리오 활동부터 아이작 스턴,제이미 라레도,초량린,리처드 스톨츠만 등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이어온 실내악 활동은 최근에도 끊이지 않는다.
다재다능한 경력의 첼리스트 요요 마는 관객과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내는 데 앞장설 뿐 아니라,개인적인 예술적 성장과 변화를 추구하는 데도 멈춤이 없는 선구자적인 아티스트이다.
새로운 협주곡의 연주,널리 알려진 첼로곡 연주,실내악을 통한 음악가들과의 교류,서양음악의 전통 너머에 있는 문화와 음악 형태의 탐구 등 요요 마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연결 고리들을 찾는 데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요 마는 리사이틀 및 전세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솔리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실내악 연주자로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엠마누엘 액스,다니엘 바렌보임,크리스토프 에셴바흐,파멜라 프랑크,제프리 카안,톤 쿠프만,제이미 라레도,바비 맥퍼린,에드가 마이어,마크 모리스,마크 오코너,고 아이작 스턴,캐서린 스톳,우 만,데이빗 진만 등 장르를 초월한 많은 음악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영감을 얻어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 작업은 아티스트들과의 상호 관계를 통해 더욱 깊어져,특정 장르의 범주를 뛰어넘는 창작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요 마가 추구하는 음악 활동 중의 하나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음악,아이디어 전달 매체로서의 음악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향해서,자신의 뿌리인 중국 음악과 아프리카 부시족의 칼라하리 음악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깊이 몰두해왔다.
이러한 관심사를 더욱 발전시켜,요요 마는 지중해로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고대 실크로드 무역로를 따라 형성된 문화적,예술적,지적 전통의 연구를 진흥시키고자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광대한 지역의 사상 흐름을 연구함으로써,실크로드 국가들의 문화유산을 재조명하고,오늘날의 전통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재확인하고 있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일련의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공통 자원을 가진 조직으로서 2002년 스미소니언 민속생활 페스티벌을 비롯한 수많은 페스티벌에 참가해왔다.
요요 마는 소니 클래시컬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75장이 넘는 음반을 내놓았는데,이 가운데 15장의 음반이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는 다양한 음악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위촉 또는 초연한 작품들도 다수 녹음해 왔다.
로사 파소스,에그베르투 지스몬치,세자 까르고 마리아노 등과 함께 브라질 음악을 녹음한 “오브리가도 브라질”,바비 맥퍼린과 함께한 “허쉬”, “애팔래치아 왈츠”,그래미상 수상의 마크 오코너 및 에드가 마이어와의 “애팔래치아 여행”,그리고 피아졸라의 “탱고의 영혼” 등 크로스오버 음반은 커다란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요요 마가 최근 내놓은 앨범으로는 컴필레이션 음반인 “열정(Appassionato)”과 “새로운 불가능(New Impossibilities)”,“클로드 볼링 - 첼로와 재즈 피아노 트리오를 위한 모음곡”,“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요요 마가 연주한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Yo-Yo Ma Plays Ennio Morricone)” 등이 있다.
2007년 7월에는 실크로드 앙상블,그리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이브 앨범을 녹음했다.
또한 그는 롭 마샬 감독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존 윌리엄스를 위해 영화음악 연주에 참여하기도 했다.
요요 마는 클래식 분야에서 베스트셀링 음반을 녹음하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다.
요요 마는 젊은 관객과 교류를 나눌 뿐 아니라 그들이 직접 참여토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주 여행을 하면서 가능할 때마다 마스터 클래스를 비롯하여 학생들을 위한 비공식 프로그램을 여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현재 요요 마는 아내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두 가지 첼로를 사용하고 있는데,베니스에서 만들어진 1733년산 몬태냐나 첼로와 171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인 ‘다비도프’로 연주하고 있다.
첼리스트 야노슈 스타커는 일찍이 요요 마가 가진 예술적 깊이와 스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첼로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레퍼토리가 현저히 적기 때문에 독주자로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이다.
현존하는 첼리스트 가운데 로스트로포비치(현재 그는 세상을 떠남)와 요요 마 두 사람 정도가 첼로 독주자로만 활동해도 충분히 생을 영위할 수 있는 아티스트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자신도 위대한 첼리스트인 야노슈 스타커의 독백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오늘날 음악계에서 요요 마가 갖고 있는 위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음악가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음악적 깊이나 연주력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요요 마는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음악가이다.
우선 그는 클래식 애호가들뿐 아니라 폭넓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연주자다.
2004년에 그가 브라질의 뮤지션들과 함께한 음반 ‘오브리가도 브라질(Obrigado Brazil)’이 그래미상을 수상하면서 클래식 아티스트로서는 전례 없이 그래미상 15번째 수상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던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독주 레퍼토리가 현저하게 적은 첼로 분야에서 다양한 레퍼토리의 발굴과 새로운 시도를 통해 첼로 음악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또한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를 음악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는 야심 찬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요요 마의 이러한 행적들을 지켜보며 그를 유엔 평화 대사로 위촉하기도 했다.
인간의 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는 악기가 첼로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첼로의 명반으로 꼽을수 있는 것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일 것이다.
어렵기는 해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은 첼리스트들이 평생 지침으로 삼아야 할 '음악의 성서'일 뿐만아니라 흐트러진 음악의 자아를 추스르는 '거울'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때문에 카잘스도 평생 단 한번만 전곡을 녹음했고,로스트로포비치도 칠순이 넘긴 후에야 전곡음반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이 작품은 비올라,바순,클라리넷,마림바,호른.,플루트,리코더로 편곡되어 연주됐고 무용음악으로도 사용됐다.
최근 탱고와의 크로스오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첼리스트 요요마가 지난 1984년에 이어 두번째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음반을 내놓았다.
5년 간의 작업 끝에 CD와 비디오로 완성한 '바흐의 영감'은 해석,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과 함께 연주자의 내면풍경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연주를 통해 '낭만주의자 바흐' 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984년 발표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빠른 템포 설정으로 약동하는 ‘춤곡’의 의미를 되살려 낸 참신한 해석이라는 찬성파와 너무 가볍고 경박한 ‘미국적인’ 연주라는 반대파가 갈렸다.
1998년 출반된 재녹음은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영감을교류해 내놓은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줄 만하다.
전작에 비해서는 진지함이 보태졌으나 여전히 높은 완성도를 갖진 못한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의 연주는 보편적으로 템포나 아티큘레이션을 생동감이 넘치는 쪽으로 잡아가는 편이다.
한편 감정도 풍부해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도 많이 듣는다.
너무 일찍 신동으로 각광받았고,지명도만으로 볼 때는 이미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첼리스트로서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봉구와탄노이 님의 블로그에서 발췌.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EjdV&articleno=10662655&categoryId=700383
나열방식으로 소개를 하겠습니다 ^^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끔 한 장본인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초연했다.
첼로의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었다고 봐도 무방한 사람이다.
'현대 첼로 연주의 아버지' 로 불린다.
일렉트릭 기타로 치자면, 지미 헨드릭스, 잉베이 맘스틴 과도 같은
메커니즘을 바꿔버린 시초랄까.
클래식은 흔히들 딱딱하고 고정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그러나 같은 악보, 같은 음을 가지고도 이렇게나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클래식의 또 하나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다양한 연주자들의 다양한 해석. 청자들에게 있어선 진정으로 즐거운 시도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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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를 좋아합니다. 서울신포니에타 공연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2009/05/21 21:42 [ ADDR : EDIT/ DEL : REPLY ]그렇군요^^
2009/05/22 12:27 [ ADDR : EDIT/ DEL ]저도 이번에 첼로를 시작하게 되면서 주변에 오케스트라 하시는분들을 자주 봅니다 ㅎㅎ
정말 매력적인 분야에요. 현악기쪽요~ ^^
연주자에 따라 같은 곡이라도 느낌이 조금씩 틀려지나봅니다.
2009/05/22 13:03 [ ADDR : EDIT/ DEL : REPLY ]또 그런 재미가? ^^
즐거운 하루되세요~
라이너스님 방문 감사합니다 ^^
2009/05/22 13:36 [ ADDR : EDIT/ DEL ]특히 클래식쪽은 곡이 한정되있다보니 일반 대중음악에 비해 연주자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더군요.
요즘 첼로배우기 시작했구나 ㅎㅎㅎㅎ
2009/05/22 17:11 [ ADDR : EDIT/ DEL : REPLY ]최근에 첼로연주를본게 '베토벤바이러스'에서 본 Libertango 가 유일한..
유럽에 가서도 리베르탱고 길거리 연주하는 걸 들었는데,,
진짜 첼로만의 유일한 매력을 잘 살린 곡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든다는 ㅎ ㅎㅎ
담에 누군가를 통해서 다시 한번 들을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드네 ㅋㅋ
설마 나를 통해서라는 말은 아닐테고....
2009/05/22 17:21 [ ADDR : EDIT/ DEL ]첼로만의 유일한 매력을 잘살린곡이라고 섣불리 표현하면 위험하기도 한것이 원곡이 피아졸라 꺼인데.
피아졸라는 반도네온 연주자이기도 하거든.
반도네온(영어: Bandoneón)은 아르헨티나에서 유명한 일종의 손풍금이다. 특히 탱고음악에서 많이 쓰이는 악기이다. 반도네온이란 이름의 유래는 반도네온을 고안한 독일의 H.반도(Heinrich Band)의 이름에서 왔다. 독일 선원이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해가던 독일인들이 19세기 후반 전파하였다. 후에 아르헨티나에서는 반도네온을 널리 쓰게 되었다. 콘서티나와 같이 반도네온은 악기를 양 손에 쥐고 손가락으로 하나 이상의 단추를 누른 상태에서 악기를 누르고 폄으로써 연주한다. 아코디언과 매우 유사하다.
<< 위키백과 설명첨부.